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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이야기-2] 대한민국 ‘멘붕’현상에 대한 보고서/이영문(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9.26 조회수352

대한민국 ‘멘붕’현상에 대한 보고서

 

이영문

(이음병원 교육자문,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장)

 

요즘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는 소리 중 하나가 아마도 ‘멘붕’이라는 말일게다. ‘정신’을 뜻하는 ‘멘텔리티’의 첫 글자와 ‘붕괴’를 의미하는 한자어 ‘붕’이 합쳐져서 ‘정신이 붕괴되거나 붕괴 직전의 상태’임을 표시하는, 달리 말하자면, 지극히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일컫는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한국에서만 일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지극히 국지적 합성어이기 때문에, 외국 친구들에게 이 말을 소개해주는 것이 영 껄끄럽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 친구들은 이럴 때, ‘패닉’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충고해준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안다. 연예인들이 하도 많이 ‘패닉’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자기 고백을 하는 통에(일부 연예인들은 ‘우울증’을 섞어서 쓴다), 그 정도의 언어로는 자신의 상태가 지극히 정상수준이라는 암시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더 독한 개념을 만들고 싶은 자기표현의 다른 수단으로 새로운 상징어를 만든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멘붕’ 등의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만들어 쓰는 그 자체가 지독한 ‘정신분열병’의 증상임을 모르고 있다. 일명 ‘신조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지극히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자 혹은 부정하고자,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과정 중에 나타난다. 일종의 정신병리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불안정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낄 때, 이 같은 ‘신조어’ 현상은 넘쳐날 수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결국 혼란스러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들의 적응성에 기댄 몸부림인 셈이다. 장난삼아 쓰는 용어지만,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섬뜩하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왜냐하면, ‘멘붕’ 그 자체는 정신이 붕괴된, 제정신이 아닌, 그래서 자신 및 타인을 해칠 수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세상에서 과연 누가 ‘멘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낼 것인가? 결론적으로 아무도 ‘멘붕‘을 정의할 수 없다. 그저 다수의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인간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편의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과거 전제주의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까닭이다. 과거 중세기 암흑시대에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판단하는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벌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심지어는 이를 기록하고 가르치는 교본이 있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는 지극히 가난한 자는 매우 게으른 자와 동일시되고, 일을 못하는 장애의 개념이 덧칠되어 감옥 혹은 정신병원에 갇혔다. 20세기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유대인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수만 명의 정신질환자들이 감금되어 죽거나, 겨울에 밥이 없어 굶어 죽거나, 인체 실험을 당하면서 죽었다. 독일국민들은 이들을 박멸(영어 원문 그대로 정확한 표현이다)하는 법에 찬성했다. 그들 역시 ‘멘붕’ 상태였던 것이 틀림없다. 요즘, 우리 사회상을 바라보다 보면, ‘마녀사냥’, ‘비상식의 극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우울증을 만드는 사회’, ‘자살을 권하는 사회’ 등의 많은 말을 본다. 모두가 정신건강과 연관된 단어들이다. 한병철의 주장대로 이 시대는 피로사회다. 그의 말은 적어도 한국사회에 백퍼센트 공감이 가는 팩트를 제공하고 있다. 피,로,사.회. 이 단어에 우리 사회의 일그러짐이 모두 들어가 있다. 자기 성과를 도저히 더 이상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죽어가는 사회를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오늘도 누가 죽어나갈 것이다. 우리가 그 일원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오늘도 밤늦게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안은 채 그저 잠이 들고, ‘멘붕’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게 될 시간들을 기다려본다. 아직 뾰쪽한 수가 없다. 다만 정신건강센터와 사회복귀시설 사무실의 전등이 늦게까지 꺼지지 않는 것을 본다. 우리 모두의 고민이 깊어져 가지만 여전히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본다.

 

교신 : 사람이 희망이다 humanishop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