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상세보기
상실을 피하기보다 껴안아야 하는 이유
작성자 블루터치 작성일 2024.03.12 조회수347

상실을 피하기보다 껴안아야 하는 이유

우리의 인생은 계절에 자주 비유된다. 꽃이 피는 봄은 어떤 꿈이든 꿀 수 있는 어린 시절에, 잎으로 무성한 여름은 열정이 불타오르는 청년 시절에, 단풍으로 알록달록 물드는 가을은 중년에, 잎이 떨어지고 모든 자연이 잠이 드는 겨울은 노년에 비유가 된다. 이 비유의 본질적 의미는 인생이 언제나 같을 수 없다는 것 아닐까. 봄처럼 늘 만개할 수 없고, 여름처럼 늘 타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내리막 길의 순간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봄을 맞이 하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반드시 거쳐야하는 것처럼, 성장을 위해서 마주해야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통과의례 중 하나가 소중한 것들과의 작별, 상실의 순간들이다.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은 슬프고 막막한 일이다. 어린 시절 추억을 쌓았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둘도 없이 친했던 어린 시절의 친구와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다. 가족만큼 친밀했던 연인은 헤어지면 남이 되고, 남이 되어야하기에 허망하고 슬프다.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가족의 상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어렵게 할만큼 아프다. 상실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피할 수 있는 법을 배우기보다 건강하게 마주하고 헤어짐과 잃어버림을 나답게 잘 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외할머니는 큰아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큰아들 바보였다. 삶의 나침판이자 자랑스러움이었던 큰아들이 40대 후반의 나이로 일찍 죽었을 때, 외할머니는 인생의 전부를 잃은 사람처럼 식음 전폐를 선택하셨고, 2년간 말을 잃으셨다. 그 뒤로 몇 년간 외할머니 앞에서는 가족들은 큰 외삼촌이 살아계신 것처럼 행동했고, 그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나중에 뒤돌아보면 큰외삼촌을 잃은 상실보다 그 뒤의 애도를 함께할 수 없음이 가족에게 더 큰 상처가 된 것 같다. 가족들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그 이후로 서로에게 서먹한 무언가가 생겼다. 애도는 잃은 뒤에 공허한 마음을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다. 애도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 때, 훨씬 그 힘을 발휘한다.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과 기억을 꺼내고 이야기하고, 내가 그 관계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 헤어진 연인도 ‘정말 나쁜 사람이었어' 하고 욕하고 묻어두는 것보다 그 관계에서 난 왜 힘들었는지, 내가 행복했고 좋았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나에게 어떤 것이 필요했는지 애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지난 시간을 꼭꼭 씹어 소화하고 나면,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희망과 용기가 조금씩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안에 슬픔을 극복할 힘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충분히 슬퍼해야 그 안에서 다시 회복할 용기의 싹이 움트는 것이다. 책 <H마트에서 울다> 는 한국계 미국인인 미셸 자우너가 말기 암을 맞이한 엄마의 상실을 예감하고, 엄마가 떠나는 날을 함께하며 엄마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미셸 자우너는 학창시절에 살아온 환경도 생각도 다른 엄마와 자주 갈등을 일으켜왔는데, 엄마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복합적인 마음을 겪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엄마를 잘 보내고 싶은 미셸 자우너의 마음이 느껴졌다.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책을 집필한 것이다. 엄마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자신과 엄마의 추억과 갈등을 다시 곱씹고,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기록하는 과정에서 미셸은 엄마를 보낼 용기를 찾았을 것이다.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은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를 남긴다. 늘 옆에 있을 거라 생각한 공기 같은 존재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 깨닫고 나면, 우리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으로 변해있다. 상실이 우리에게 주는 아픔이자 배움인 셈이다. 영화 <애플>은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처럼 커진 도시의 이야기에서 <인생 배우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기억 대신 새로운 추억과 기억으로 새로운 인생을 쌓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남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괴로움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척하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인생을 새롭게 쓰고 싶었을 것이다. 프로그램에서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던 그는 한참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는다. 새로운 기억을 쌓는 것보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돌보며 시작하는 것이 더 값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다시 집으로 돌아가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는 그는 늘 먹던 사과를 먹으며 아내의 죽음을 비로소 받아들인다. 사랑했던 것, 소중한 것을 잃으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애초에 나에게 없었다면?’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리셋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리셋은 반드시 겪어야했던 슬픔을 무의식에 남겨두고, 해결하지 못한 아픔은 우리의 삶을 계속 좁힐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선택할수록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없다. 상실을 맞이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슬픔을 충분히 겪어낼 수 있게 가만히 두는 것이다.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빨리 잊으라는 이야기도, 별거 아니라는 말도 아닌 슬픔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상실한 누구에게도 가장 도움 되는 손길이다. 슬픔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 찾아온다. 겨울 내내 떨어졌던 잎이, 죽었을 거라 생각한 고목에서 봄이 되면 싹이 돋 듯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침잠의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에너지를 만들어준다. 상실을 위한 준비는 어렵지만,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은 있다.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충분히 슬퍼하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상실을 삶에서 필요했던 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손하빈 서울시정신건강지킴이 밑미대표 전Airbnb Korea 브랜드 마케팅 팀장 전 IBM Korea 파이낸셜 플래너, 마케터, 비즈니스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