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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삶으로 들어오려면
작성자 블루터치 작성일 2022.08.02 조회수85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 책을 그저 소비한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우리가 책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읽는 행위'가 아니라 ‘소비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책을 다 읽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그 책에 대한 잔상이 남아있지 않거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 책을 소비했을 확률이 높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일상의 익숙함에 균열을 일으키는 생각을 만나기 위함이다.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일상의 생경함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책을 읽는 것도 여행과 닮은 구석이 있다. 책에서 평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문을 만나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삶을 반추할 기회를 얻는다. 책을 몇 권을 읽었는지, 얼마나 많이 읽는지보다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삶과 연결 지어 생각했는지가 중요한 이유다. 우리가 다른 콘텐츠와 비교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속도'에 있다. 책은 다른 콘텐츠와 달리 속도 조절이 내 마음에 따라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단어를 만나면 우리는 언젠가 찾아갔던 그 바다를 불러옵니다. 인식 주체가 그 ‘바다’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바다 영상 앞에서 인식 주체가 할 일은 없습니다”


신영복의 <담론>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가장 잘 표현한 문구가 아닐까? 우리가 책에서 어떤 단어와 이야기를 만나면 저마다 자신의 기억을 더듬거나 상상력을 동원해 머릿속에 각자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바다'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누군가는 남해의 노을 진 바다를, 누군가는 강릉의 파도치는 바다를 그릴 것이다. 이때 우리의 기억은 활성화되고, 책을 통해 내 안의 이야기가 다시 만들어진다. 하지만 영상은 구체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상상이 존재할 자리가 없다. 다시 말해 인식의 주체인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나와 만나기 위함이다. 책을 통해 내 안에 묵혀있던 이야기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 시간들이 쌓이면 주체적으로 생각할 힘이 커진다. 지금처럼 영상 콘텐츠가 인식의 구조를 지배하는 시대에 익숙해진 우리는 생각을 요하는 책 읽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상으로만 정보를 접하게 되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지 생각하는 근육이 흐물거리고, 점차 소멸하게 된다. 내 삶을 나만의 심상으로 그리고 싶다면 책은 그 시간을 만들어준다.


책을 소비하지 않고, 경험하기 위해서 좋은 독서법은 천천히 읽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속도의 강박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속독으로 읽는 책도 그 만의 효용이 있지만, 나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고 싶다면 <슬로 리딩>이라는 독서법을 해보는 것도 좋다. <슬로 리딩>은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 많은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독서법으로 일본 고베시 나다 중·고등학교에서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님이 30여 년 전에 진행했던 수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속도와 성과를 중요시하는 한국 교육에서는 빠르게 지식을 섭취하는 독서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처음에 슬로 리딩을 접하면 어색하고, 답답할 수 있지만 한 권을 제대로 읽고 나면,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줄을 그어보기도 하고, 나는 어땠는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책에서 나온 음악이나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책 하나로 오감을 경험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최근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일인칭 단수>에는 음악이 자주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들이 음악 취향을 공유하거나, 음악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 장면을 읽을 때는 잠시 멈추고 그 음악을 찾아 듣는다. 그 경험 덕에 <일인칭 단수>를 다시 떠올리면 인물의 감정이 더 또렷이 기억나고 청각의 경험으로 그 책을 기억하게 된다. 책이 스토리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을 들었던 내 상황과 감정과 함께 기억되는 것이다.


또 다른 좋은 방법은 기록을 하는 것이다.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구를 필사하거나, 책을 읽은 다음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책을 입체적으로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 속 인물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매일 한 권의 책을 30분 정도 집중해서 읽고 좋았던 문장을 필사한다. 그리고 책으로 말랑해진 마음을 감정 일기로 기록하는 리추얼을 밤마다 하고 있는데, 한 달 뒤에 필사한 문구만 읽어도 내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점점 선명하게 알게 된다. 대단한 목표를 잡기 보다, 책 한 권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매일 조금씩 책장을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순간 책의 활자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헤엄치는 감각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