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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이야기-11] 여우와 신포도/이명수(서울시정신건강증진센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3.06 조회수326

‘여우와 신포도’

 

이 명 수

(서울시정신보건센터장)

 

배가 고픈 여우가 나무위에 달린 포도열매를 보고 따먹으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열매가 너무 높게 매달려 있어서 결국 먹지 못하자 여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포도는 틀림없이 너무 실거야’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인간 심리의 ‘합리화’ 기전을 보여주는 예로서 인용되곤 합니다.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동기에서 나온 행동 또는 판단을 그럴듯하게 이치에 닿는 이유를 내세움으로서 마음속의 불편감,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방어기전을 ‘합리화’라고 합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현실의 공존, 얼핏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본인은 두 개의 심리적 현실이 공존하는 것에 대하여 괴로움도 없고 갈등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합리화라는 무의식적 방어기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의 내적 갈등을 없애기 위한 자기보호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서, 도덕성을 부르짖고 국민사랑을 외치는 정치인의 신상털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사회의 합리화 현상을 원 없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최근 몇 년간 큰 유행을 타고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과정에서도 합리화는 등장합니다. “음악은 음정보다 박자가 더 중요하다, 소리가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등의 대국민 음악 레슨을 하던 심사위원이 한 참가자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은 내가 배울 것이 없어서 별로였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참가자의 노래실력 뽐내기와 더불어 심사위원들의 합리화 경연대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합리화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자기보호 방법이고 자기 논리와 행동에 대한 체면유지를 위한 방어기전이지만 자기기만이 지나치거나 병적으로 심해지게 되면 정신질환으로 나타나거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합리화는 거짓말과는 다릅니다. 합리화는 무의식적 방어기전으로 그 언행을 합리화시켜나가는 것이고 거짓말은 그 행동의 설명이 허구라는 것을 본인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사용하는 합리화가 거짓말보다 더 나아보이기도 합니다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사회유력층의 자기모순적 발언이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짓은 본인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기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도가 심한 합리화는 정신분석적 치료가 필요한데 그 분들이 치료를 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