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상세보기
`내 안에 다른 존재가…` `TV에 자꾸 내 얘기 나와` - 중앙SUNDAY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05.08 조회수1874
2007. 5. 7. 중앙SUNDAY


`내 안에 다른 존재가…` `TV에 자꾸 내 얘기 나와` 

정신병동 르포 - 세브란스 정신건강 병원


작년 정신질환 진료 168만 명, 4년 만에 26% 늘어 … “정신병은 수치” 거부감에 치료 기회 놓쳐

갑자기 얼굴이 변해갔어요. 마치 내 안에서 다른 존재가 밀고 나오는 느낌. 아, 그것은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었어요.(환자 A씨)

TV를 켜면 자꾸 내 얘기가 나옵니다. 아무래도 나는 특별한 사람인가 봐요. 내 귀에만 들리는 그 목소리… 몸서리를 치지만 벗어날 수 없어요.(환자 B씨)

오전 10시30분. 경기도 광주의 세브란스 정신건강병원. 조현상 진료부장(교수)이 폐쇄병동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번호 누출 주의’ 딱지가 붙어 있다. 조 부장 등 의료진과 함께 병동 안으로 들어선다. 회진 시간이다.

하얀 환자복 차림의 사람들이 흘깃 쳐다본다. 한 40대 환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그때 손 하나가 조 부장의 소매를 잡는다. 고개를 돌리자 20대 청년이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불안하다.

“저… 선, 선생님. 자꾸 저만 귀가 있는 것 같아요. 남들 귀는 다 잘린 것 같고…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럼, 말이 안 되지.”
“제가 신(神)이라고 해서… 부, 부모님이… 벌을 받진 않겠죠?”
의료진은 복도 맨 끝 병실에 들어선다.
“오늘 어때요? 화난 것 같네?”

역시 20대 젊은이다.

“어제 제 애인 갈 때요, 배웅하러 나가지도 못하게 하잖아요.”

끙 하고 돌아눕는다.

전공의(레지던트)가 “문을 주먹과 발로 치는 사고가 있었다”고 귀띔한다. 조 부장은 “순간적으로 흥분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그러면 되겠느냐”고 타이른다. 다시 복도로 나오면서 “여자 친구도 없는 친구가…” 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조 부장은 “정신분열병 중에서도 뭐라고 진단 내리기 어려운 미분화형, 2개 이상 질환을 앓는 공존 질환 환자가 느는 추세”라면서 “조울증 환자도 봄철에 많았던 종전과 달리 요즘은 연중무휴로 찾아온다”고 한다. 김어수 전임의(연구강사)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개인정보가 새어 나간다는 피해망상으로 컴퓨터를 부수는 사례가 상당히 많다”고 전한다.

과연 ‘남의 일’일까.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자. 지난해 건강보험 가입자 중 정신질환으로 진료받은 사람은 168만여 명에 달했다. 2002년과 비교해 4년 만에 26%가 늘어난 것이다. 매년 가속이 붙는 추세로 볼 때 3~4년 안에 200만 명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특히 9세 이하의 경우 지난해 9만1343명으로 4년 전보다 38.1% 증가했다. 10대는 10만7574명으로 68.7%나 급증했다.

서울대 의대 소아정신과 황준원 교수는 “일단 어떤 것에 중독되면 다른 것에도 중독되기 쉽다”며 “청소년기의 인터넷ㆍ게임 중독이 술이나 도박 등 다른 중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 병실. 50대 여성이 병상에 앉아 있다.

“그분 말이에요. C사장님… 뉴스 보니까 삶이 변화되고 있어. 내가 그동안 편지 보낸 보람이 있어.”

들뜬 표정이다. 조 부장은 “이제 큰일 하셨으니 편안하게 쉬세요” 하고 병실을 나선 뒤 담당의에게 투약량 조절을 지시한다. 또 다른 병실의 1인용 소파엔 안경 쓴 40대 여성이 빙긋 웃으며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선한 인상이다.

“남편 분하고 면회 잘했어요?”
“예. 그이가 살이 많이 빠져 걱정이에요.”
“그러게… 빨리 나가야지. (침대 머리맡 인형을 가리키며) 저건 뭐예요?”
“딸… 집에 있는 딸 생각하면서 안고 자요.”

이 여성은 한 재벌 총수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는 망상에 빠졌다. 입원 후 집중 투약을 받으면서 상태가 나아졌다. 조 부장은 “과거엔 대통령이나 안기부(현 국정원)와 관련된 망상이 많았는데 요즘은 재벌 회장 같은 재계 인물이 등장한다”며 “사회적 힘이 이동하는 추세를 반영해 포장지(투사 대상)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진을 마치고 나오는 순간 입구에서 마주쳤던 청년이 다시 조 부장 쪽으로 다가온다.

“서, 선생님…목에 빨간 줄이….”
조 부장이 “아, 이거 면도하다 생긴 거야” 하며 가볍게 목을 두드린다. 청년의 얼굴이 어둡다.

오후 2시10분. 50분간의 산책 시간이다. 병원 앞뜰로 120여 명의 환자가 쏟아져 나온다. 배드민턴 치는 사람, 담배 피우는 사람, 수다 떠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하루에 한 번 받는 햇볕 때문일까. 표정이 서울 거리에서 마주치던 사람들보다 외려 환하다.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가 지난해 4월 서울 시내 거리에서 시민 1331명을 대상으로 우울증 검사를 했다. 그 결과 남성은 10명 중 3.6명, 여성은 10명 중 4.6명이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2005년 1만2047명으로 5년 전의 두 배로 늘었다. 15분 만에 한 명꼴이다. 자살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 올 들어선 가수 유니, 탤런트 정다빈 등 연예인이 잇따라 자살해 충격을 주었다. 정신질환 관련 범죄도 늘고 있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신영철 교수는 “사회 부적응 기간이 길어지면 분노감이 쌓여 공격적으로 변하기 쉽다”면서 “정신분열은 범죄 성향이 강한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구분돼야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빚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병원 앞뜰. 담당의가 입회한 가운데 환자 D씨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2년 전에 환청이 시작됐어요. 모기 소리처럼 작았는데, 나중엔 양쪽 귀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소리가) 너무 커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심리상담소ㆍ종교단체ㆍ점집… 용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점집에서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그 즈음 D씨에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다른 존재로 변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오빠를 향해 ‘으르렁거린’ 것이다. 결국 D씨는 두 달 전 자진 입원했다.

“하루에 세 번 알약 12개씩을 먹는 게 싫어요. 그래도 나아지고 있어서 좋아요. 환청이 하루 몇 번밖에 안 들리거든요. 빨리 정상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요.”

담당의인 박지인 선생은 “좀 더 일찍 치료만 받았어도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서울시 소아청소년광역정신보건센터가 2005년 9월부터 4개월간 만 6~17세 2672명을 대상으로 정신질환 유병률을 조사했다. 그 결과 3명 중 1명이 정신질환 위험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센터 측은 지난해 10월 이 중 290명의 부모에게 자녀의 진료를 권유하는 우편물을 부쳤다. 그러나 진료를 받겠다고 밝힌 부모는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센터의 유승제 예방사업팀장은 “정신분열은 보통 10대 후반과 20대에 발병하는데, 발병 직전의 전구기(前驅期)부터 이상징후가 나타난다”며 “이때 기회를 놓치면 회복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신질환을 수치로 여기는 동양적 사고가 치료로 이어진 다리를 끊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사춘기 반항일 거야” “원래 남자 아이는 정신이 없어” “여자 아이라서 새침한 거야” 하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될 줄도 모른 채.

오후 5시20분. 집단치료실에 환자들이 모여 있다. 환자 5명이 전공의들과 가벼운 게임으로 긴장을 푼 뒤 토론을 시작한다.

강박증을 앓는 E씨는 “문이 잠겼는지 계속 확인해야 했는데, 횟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F씨는 “거리에선 남들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고 전화하면 도청 당하는 기분이었다”며 “요즘은 좀 뜸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집단치료실을 나오니 병동 내 식당에서 환자들이 식판에 음식을 담으려고 줄을 서 있다. 어떻게든 병을 이겨내자는 안간힘으로 또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다. 차를 타고 나오며 병원을 돌아보니 환자 한 명이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권석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