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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들이여 자주 울어라 - 뉴스위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7.03.21 조회수1158

 2007. 3. 14. 뉴스위크 한국판

 

한국 남성들이여 자주 울어라

뉴스위크 “한국에서 남성 우울증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중앙대 의대 부속병원 조현주 박사의 말이다. 2001년 보건복지부 역학 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이 1년 사이 우울증에 걸릴 유병률은 0.9%로, 여성 유병률 3.6%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남성 우울증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정부 차원에서 정신질환 연구에 대규모 기금을 지원한 첫 번째 사례인 우울증임상연구센터에서도 특정 인구와 연관된 연구목록에는 노년, 아동, 여성의 우울증만 있지 남성 우울증이 없다.

한국의 남성 우울증은 아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현실에서는 심각한 징후가 포착된다. 지난해 한국의 자살 증가율은 OECD 회원국 중 최고를 기록했다. 2005년 한 해에만 1만204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중 남성 자살자가 8000여 명으로 여성의 곱절이다. 학계는 자살자의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본다.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에 여러 가지가 있다 해도 80%는 우울증도 함께 앓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는 우울증 환자 남녀 성비를 1대 3 혹은 1대 2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임상 경험으로 볼 때 남성 환자는 2001년 서울대 역학조사 연구결과(남녀가 1대 4의 비율)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된다”고 조현주 박사는 말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남성 우울증 환자가 많다는 얘기다. 남성 우울증이 더 이상 관심의 사각지대에 머물지 말아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IMF 증후군, 퇴직 증후군, 기러기 아빠 증후군 등 한국 사회에서 남성 우울증이 과거보다 더 증가할 조건은 수두룩하다.

남성 우울증의 통계와 임상 경험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실 대부분의 남자는 우울하다고 병원을 찾는 게 ‘사내가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왜곡된 남성다움의 내면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하지만 “가부장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거나 흐트러지는 현실을 못 참는 건 우리나라 남성이 훨씬 강하다”고 우울증임상연구센터 소장이자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교수인 전태연 박사는 말했다. 그래서 우울증을 속으로 삼키고 만다. 무엇보다 한국 남성은 정신과 진단 자체에 거부감이 매우 강하다.

“서양 사람은 병원에서 우울증이라고 하면 그냥 쉽게 받아들이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왜 내가 정신과에 가느냐’며 화를 내고 내과만 찾아 다닌다”고 대한우울·조울병학회 회장인 조맹제 서울대 교수는 말했다. 아직도 정신과는 미친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울함을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또 치료보다는 술, 도박, 약물, 섹스 등 다른 수단(은폐 기제)에 호소하는 일이 많아 우울증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를 둘러싼 독특한 문화와 사회통념이 또 하나의 은폐 기제로 작용하는 셈이다.

게다가 한국형 우울증은 증세가 조금 더 달리 나타난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다. “우리나라는 요통, 복통, 관절통, 근육통, 만성피로 같은 모호한 신체증상을 호소하는 신체화(somatization) 환자가 많다”고 이민수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는 말했다. ‘우울한 기분’ ‘흥미의 결여’ ‘지나친 죄책감’ ‘무가치감’ ‘우유부단함’ 등을 호소하는 서구의 환자들과 우리의 환자들이 사뭇 다른 점이다.

목이나 가슴에 덩어리가 뭉치고 열이 차 있는 듯 느껴지는 화병도 우울증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한국형 우울증의 하나라고 보여진다. 박영남 계명의대 동산의료원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한국형 우울증이 존재하는 이유를 “정신과 신체를 동일시하고 빙의같이 초자연적 현상이나 주술을 잘 믿는 샤머니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고 추측했다. 이런 한국형 우울증은 남녀 공통으로 나타난다.

중견기업 과장 A씨(45)는 한국형 우울증의 전형적 사례다. 회사가 정리해고를 시작하자 스트레스가 컸던 그는 수면장애로 시작해 변비와 설사가 끊이지 않았고 복통도 이어졌다. 1년 여 동안 내과를 다니며 위장·대장 내시경을 비롯해 초음파검사까지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내과의사의 권유로 정신과를 찾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는데 3주째부터 수면장애와 신체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체 증상 때문에 우울증 환자가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을 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잦다. 이민수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정신과 교수가 2006년에 실시한 ‘한국 우울증 진료현황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환자는 발병 후 약 3.9년 만에, 그리고 내과 등 평균 2.5개의 다른 과를 거쳐 비로소 우울증을 전문으로 하는 정신과를 찾았다. 통증 등 신체 증상을 호소하며 여러 병원을 전전하지만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을 때에는 우울증이 의심된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우울증에도 초기치료가 중요한 만큼 다른 병원을 전전하면 병을 키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남성 우울증 환자가 술에 의존하는 경우는 서양보다 많다. 마약 등 약물이 비교적 덜 흔하기 때문이다. 2001년 알코올 중독 전문병원인 광주 다사랑병원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 알코올 중독자 중 63.4%가 우울증을 앓았다. 그리고 남성 우울증 환자 중에는 우울증이 알코올 중독으로 나타나는 일명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 많다. 이때는 우울증 치료가 선행돼야 한다. 술 때문에 부인과 자녀가 모두 곁을 떠난 K씨(50)가 바로 그런 경우다. 30년 동안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 받은 그는 꾸준히 치료 받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치료소의 소개로 정신과를 찾았는데 우울증 진단이 나왔고 이를 치료하면서 술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2004년 ‘한국인 주요 우울 장애의 증상 특성’ 연구를 보면 여성은 눈물을 흘리며 불면과 불안, 그리고 신체 증상을 주로 호소한다. 반면 남성은 음주 욕구의 증가를 빈번하게 호소했다. 사실 한국 남성들은 소주, 양주, 폭탄주 등 각종 독주(毒酒)를 즐기기로 유명하다. 2002년 우리 국민이 1인당 마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4.5ℓ로 러시아, 라트비아, 루마니아에 이어 세계 4위를 기록했다.

이를 15세 이상 남녀로 한정하면 한 해에 1인당 68병의 소주를 마시는 셈이다. 지속적으로 늘던 술 소비량이 2005년 주춤했지만 소주, 위스키 등 도수 높은 술의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여성은 우울증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오히려 병원을 많이 찾는다. 하지만 남성은 외부 활동이나 술 등으로 잠시나마 우울함을 잊어버리려 한다”고 이상환 신경정신과 원장인 이상환 박사는 말했다.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는 남성들의 성향은 경미한 우울증을 규칙적 운동 등으로 해소해 버리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을 못 본 척 지나치고 일만 열심히 하다 병을 키우는 경우도 많다. 대기업 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M씨(55)는 1998년 동료들이 대량 해고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딸의 혼수 문제 때문에 부부갈등을 겪으면서 부인에게 무능하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마음이 몹시 괴롭고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우울증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 어디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회사 업무도 변함없이 계속했는데 1년쯤 그렇게 지내다 상태가 심각해졌고, 결국 출근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에 빠졌다. 뭔가 이상을 감지한 부인 손에 이끌려 정신과를 찾았지만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뒤였다. 당장 입원을 권유받고 집에 돌아와 입원 준비를 했다. 그러나 부인이 짐을 싸는 사이 그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조맹제 교수는 자살의 원인을 엉뚱하게 지목하는 우리 사회의 자세도 우울증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조 교수는 “연예인이 죽으면 인터넷 댓글이 문제, 멀쩡한 회사원이 죽으면 경제가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바로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울증 치료를 통해 자살률을 낮춰야 함에도 사회 분위기는 경제나 문화 같은 구조적 문제에 책임을 돌리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얘기다.

실제로 의사들은 우울증처럼 치료 효과가 높은 병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전태연 교수는 “암의 경우는 치료와 비치료의 사망률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울증은 치료 받으면 사망률이 6배나 낮아진다”고 말했다. 정신 질환 자체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은 우울증, 특히 약을 보는 편견이 매우 심하다. 특히 한번 먹기 시작하면 중독이 돼 평생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 이가 많다. 이민수 교수는 “우울증 약은 중독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호주는 인구가 우리의 절반이지만 우울증 약 처방량은 3배에 이른다”고 조맹제 교수는 말했다. 외국에서는 그만큼 대중적으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우울증 환자의 80%가 약물로 치유 가능하다. 우울증 치료가 사람을 살린다.”

자살과 우울증은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이 선정한 건강 수명에 영향을 주는 세계 10대 장애요인에서 우울증, 알코올 남용, 조울증, 정신분열병, 강박장애 등 정신과 질환이 절반을 차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에는 심장 질환 다음으로 우울증이 가장 큰 노동력 상실을 초래하는 질병이 되리라고 내다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 또한 직원의 정신건강에 신경을 쓰게 됐다. 1∼2년 전부터 몇몇 국내 기업도 가정 생활, 부부 갈등, 자녀 상담 등 직원 사생활 상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70년대에 이미 도입됐으며, 포춘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중 90% 이상이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시행한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내부 상담소를 운영하고 유한양행, 하나은행, 한국수자원공사, 현대하이스코, 한국화학연구원, 구글코리아, MS, 한국전력기술 등은 외부 업체와 용역 계약을 맺어 직원 지원 프로그램( EAP : Employee Assistance Program)을 제공한다. EAP 전문 컨설팅업체 다인 C&M의 강민재 컨설턴트는 “우울증과 불안증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병행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기업은 아직 소수에 그친다.

우울증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기 어렵도록 만드는 법률적·사회적 제도도 문제다. 예컨대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6개월 이상 입원 가료를 받은 사람은 운전면허 수시적성시험의 대상이 된다. 경찰은 2002년 건강보험관리공단에 99년부터 2001년까지 중증 정신질환자의 정보를 요청해 운전면허 수시적성시험을 보라고 통보했다. 환자의 개인정보가 담당의사도 모르는 사이 건강보험관리공단을 통해 유출된 셈이다. 더구나 이미 89년에 완치돼 10여 년 무사고 운전자였던 사람에게도 수시적성시험을 보도록 통보됐다고 한다. 환자의 비밀유지 의무를 적시한 의사법과 달리 도로교통법은 환자의 비밀을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보험 가입 때도 정신질환 환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많다. 삼성생명이나 교보생명 등 대형 보험회사의 홍보담당자에 따르면 “보험 가입 허용여부는 내규에 따른다”고 한다. 삼성생명 홍보담당자는 “가족의 죽음 등 명확한 외부적 요인 때문에 우울증이 발생했다면 보험 가입이 가능하지만 그 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우울증 환자는 자체심사를 거친다”고 말했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스트레스의 요인이 그렇게 똑 부러지게 명확한 경우는 드물다. 우울증으로 병원에 한 번 갔을 뿐인데도 보험 가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불만도 나왔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우울증 치료를 받기는 어렵다.

우울증은 유전적 원인과 사회문화적 스트레스 요인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 발생하는 병인 만큼 공중보건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배려돼야 한다. 현재 자살 시도자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등 범정부 차원의 자살방지 대책이 마련돼 간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문제인 우울증의 대책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되지 않는다면 자살을 시도한 환자만 챙기는 사후약방문 처방이 될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사실 남녀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우울증 무방비 상태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은 상대적으로 치료에 적극적이며,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우울을 호소할 줄 안다. ‘한국인 주요 우울장애의 증상 특성’ 연구에 따르면 울음은 여성이 우울증에 대처하는 효율적 수단이다. 사실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하면 정신건강에도 좋다. 눈물은 솔직한 마음의 고백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남성은 그렇게 할 줄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으로 골병을 앓는 경우가 많다. 남성이 아프면 가정과 사회도 불행하다.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는 얘기는 싹 잊어버리자. 우는 남자가 옆에 있는가? 그는 다른 남자보다 더 건강할지 모른다.

상담 언제든지 가능하다

우울증이 아닐까 싶지만 병원엔 가기 싫고, 어디 가까운 데서 알아볼 방법은 없을까?

찾아보면 많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우울증 등 정신질환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무료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국 어디서나 1577-0199 (자살 및 정신건강 상담 전화)로 전화하면 정신보건전문요원(정신보건 사회복지사, 정신보건간호사,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증을 가진 상담원과 상담 가능하다. 상담은 시간 제한없이 가능하며, 의료기관이나 정신건강 관련 지식 정보를 함께 제공받는다.

서울시의 경우 광역정신보건센터 2곳과 14개 구에 지역정신보건센터를 두고 정신상담을 실시 중이다. 지역정신보건센터가 없는 서울의 나머지 11개 구는 보건소 정신보건실에서 같은 업무를 한다. 이들 기관은 방문, 전화, 인터넷 상담이 언제든 가능하다. 방문 상담을 원하는 사람은 광역정신보건센터가 소개하는 지역정신보건센터로 가면 된다. 지역정신보건센터는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화와 방문 상담을 받는다. 방문상담 때 미리 전화로 증세를 설명하고 예약 일자를 받아야 한다.

인터넷 상담은 24시간 가능하다. 서울시 정신보건네트(www. seoulmind. net), 서울시 정신건강 핫라인(www. suicide. or. kr)에 들어가 ‘실시간 상담’ 코너를 클릭하면 상담원과의 대화가 가능하다.



이정명·류지원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