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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부르는 이유 없는 슬픔 - 중앙일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5.17 조회수1070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 우리집 주치의] 우울증


죽음도 부르는 이유 없는 슬픔
해마다 1만여 명 목숨 끊어
정신과 상담 꺼리지 말길


센티멘틸리즘의 계절, 가을입니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겐 낭만의 계절이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는 분들에겐 잔혹한 계절입니다. 가을이 되면 일조량이 줄면서 생리적으로 우울감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대개 봄에 많지만 뿌리는 가을부터 시작되는 우울증입니다.

실제 자살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영화배우 이은주씨부터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까지 유명인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982년 10만 명당 9.4명이었던 자살 사망자 숫자가 2002년엔 19.2명으로 배로 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현재 5분에 한 명씩 자살을 시도하며 45분에 한 명씩 자살로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자살 사망자만 해마다 1만여 명이나 됩니다.

자살과 관련한 가장 큰 오해는 사별과 실연, 부도 등 불행한 일이 있어야 자살이 일어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러한 외적 요인보다 우울증이란 내적 요인에 주목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도 우울증이 없으면 자살하지 않고 반대로 우울증이 있으면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생명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적으로 "자살=우울증"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자살과 우울증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울증은 쉽게 말해 "이유없이 슬픈"증세를 보이는 병입니다. 매사에 무기력합니다. 이 병은 후천적 환경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경제나 교육 수준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현대 의학은 우울증을 뇌의 질환으로 봅니다. 뇌 속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떨어지면 잘 생기기 때문이죠. 따라서 프로작이나 졸로푸트 등 세로토닌 농도를 올려주는 약물을 복용하면 대개 잘 낫습니다.

문제는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쯤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미친 사람 취급받을까 두려워 정신과를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은주씨도 우울증이 자살의 원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살하기 직전 작품인 "주홍글씨"에서도 그녀의 권총자살 장면이 나옵니다. 글쎄요. 저도 개봉 당시 그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지금 다시 보니 간간이 비치는 그녀의 미소 속에서 우울증 환자 특유의 공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매일 프로작 한 알씩만 복용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자살엔 분명 징후가 있습니다. 주위와 접촉을 끊고 우울해지며 말수나 식욕이 줄어든 경우, 주위 사람에게 자살 고백을 하거나 갑자기 여행을 떠나거나 성직자를 찾는 경우입니다.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나눠주거나 사후세계에 대한 서적을 탐닉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자살징후입니다. 주위에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위험이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가까운 정신과를 서둘러 찾으시기 바랍니다. 응급상황이라면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에서 운영하는 24시간 상담전화 1577-0199를 활용하십시오. 우울증은 치명적 질환입니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