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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정신병원 개조 프로그램 박차 - 주간조선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5.17 조회수1076
주간조선 2005-08-02

정신병원에 관한 주목할 만한 통계 하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국가 중 인구에 대비한 정신병원의 병상(病床)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답은 일본이다. 일본은 인구 1000명당 정신병원 병상 수가 2.82베드로, OECD국가 중 최고다.(OECD Health System 2002) 최저수준인 미국(0.31) 호주(0.31) 등에 비하면 9배 가량 많다.

그러면 OECD국가 중 정신병원 병상 수가 가장 많이 늘고 있는 나라는? 여기서는 한국이 정답이다. 한국은 인구 1000명당 정신병원 병상 수가 1.09베드(2003년 기준)로 많은 편은 아니지만 증가율은 최고다. 1980년부터 20년간 병상 수 증가율을 보면 한국(0.41%) 일본(0.09%) 터키(0.01%)를 제외한 모든 OCED 국가가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한국의 증가율이 최고였다.

이러한 통계를 어떻게 봐야할까. 한국의 정신질환 유병률이 유독 높아져 정신병원을 더 많이 지었고 그만큼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얘기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1960~1970년대부터 탈원화(脫院化·deinstitutionalize)라는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왔다. 전통적인 방식의 격리·수용에서 벗어나 정신질환자들을 가능한 지역사회로 되돌려 보내 재활(再活) 위주의 치료를 받도록 한 것. 이를 위해 대형 정신병원을 없애는 대신 지역사회에 가정(家庭)과 같은 분위기의 치료센터를 만들어 중증환자가 아니면 지역사회에 섞여 살며 치료받는 쪽으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WHO(세계보건기구)도 인구 1000명당 1베드를 적정 병상 상한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권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탈원화는 서구사회의 주요 정책이 됐고 많은 나라가 이를 도입했다.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는 아일랜드. 아일랜드는1980년만 하더라도 1000명당 정신병원 병상 수(3.42베드)가 OECD국 중 최고였지만 지금은 이를 3분의 1 수준(1.10베드)으로 떨어뜨렸다. 지난 20년간 감소율이 최고다. 반면 미국은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탈원화 정책을 도입했지만 지역 치료센터 등 기반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해 범죄자, 노숙자 양산 등 적지 않은 진통을 겪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탈원화 정책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한 상태. 1997년 정신질환자의 인권 존중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정신보건법이 제정되었지만 옛날 시스템을 답습해왔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가 이런 낡은 시스템의 전면개혁을 위해 칼을 빼들었다.

작년에 '서울 정신건강 2020' 사업안을 마련한 서울시는 올해부터 2020년까지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정신보건복지 서비스 체계 구축'을 목표로 대대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다. 1차 사업연도인 올해부터 2008년까지만 1000억원 이상의 자금이 투입될 계획이다. 서울시는 지난 5월 호주 멜버른시와 협력체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정신질환 치료와 재활 시스템이 발달한 멜버른시로부터 컨설팅을 받고, 전문가 교육과 재활 프로그램 공동개발 등의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기존의 정신의료기관과 지역사회와의 연계 사업 등을 벌일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를 설립했고 정신질환자들이 생활하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지역시설 증설에 나섰다. '그룹홈(group home)'으로 불리는 지역시설은 민간이 운영하는 기존의 8곳 외에 공공 그룹홈 7곳을 이미 신설했고, 하반기에 3곳을 추가로 신설할 계획이다. 앞으로는 스스로 약을 먹거나 외출이 가능한 경증(輕症) 정신질환자들이 머무는 현재의 그룹홈에서 더 나아가 증상이 좀더 심각한 환자들도 머물 수 있는 '병원지원형 그룹홈'도 만들 계획이다.

보조금 받으려고 입원하는 경우도

서울시 박민수 보건정책과장은 "병원지원형 그룹홈은 현재 공모안을 마련하는 단계"라며 "선진국처럼 대형 정신병원은 줄여나가는 대신 지역시설과 기존 의료기관이 긴밀히 연결되는 시스템을 추구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룹홈과 연계해 지역의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하고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정신보건센터도 현재 8개 구(區)에서 25개 구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서울시가 이처럼 정신질환 치료·관리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이유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한편, 재활 위주의 치료를 받게 하자는 것이다. 박민수 과장은 "한 가정에 정신질환자가 발생하면 집안이 황폐화되기 때문에 환자를 장기간 방치하다시피 격리시키는 것이 보통"이라며 "정신질환자들이 병동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정상생활로의 복귀가 불가능한 장애인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문제의식은 '현재 정신병원에 있는 정신질환자의 상당수는 병원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 이명수 센터장(정신과전문의)은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실제 병원에 수용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재원(在院) 적절성 여부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재원 부적절 비율이 50~60%나 나온다"며 "치료가 불필요한 환자들은 시설에서 내보내 지역에서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작년 7월 발간한 '서울 정신건강 2020' 사업보고서는 1999년의 한 연구를 근거로 정신보건시설 입원환자 중 45.6%만이 재원 적절성이 있고, 나머지 54.5%는 전문적 의료가 필요한 시설에서 나와 적절하게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즉 장애 정도 등에 따라 요양시설이나 사회복귀를 준비하는 지역시설(그룹홈), 혹은 가정복귀 후 통원치료나 재활훈련 등으로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에서 정신장애인으로 등록 가능한 질병에 걸린 주요 정신질환자는 서울시 전체 인구의 약 2.64%에 해당하는 26만8940명으로, 이 중 입원 중인 정신질환자는 1만4588명으로 추산됐다. 보고서는 이 중 30.9%(4508명)는 요양시설로, 17.1%(2494명)는 가정으로, 6.4%(934명)는 지역시설로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추산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2400여명을 관리할 수 있는 지역 재활 훈련시설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900여명의 정신질환자들이 사회복귀 준비를 할 수 있는 그룹홈이 준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수 센터장은 "현재 15개인 그룹홈이 앞으로 최소 35개에서 125개는 필요하다"며 "병원에서 당장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 우선 시설이 활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시가 이런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데는 걸림돌도 적지 않다. 예상보다 높은 재원 부적절성이 보여주듯 불필요한 환자들이 정신병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정신질환자라면 일단 격리시키고 싶어하는 가족의 인식과, 가족이 버린 행려 정신질환자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기초생활 수급권자의 경우 가족이 정신질환자로 입원하면 입원비가 무료인 데다 환자에게 매달 일정액의 보조금이 지급되기 때문에 오히려 환자가 입원해 있는 것이 가계에 도움이 되는 정책상의 아이러니도 있다. 자기 통장을 관리할 수 있는 환자 중에는 사회복귀를 거부한 채 보조금을 받으면서 '병원 생활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병원은 병원대로 입원환자의 수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환자들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의사 중에서도 사회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섣부른 환자 방출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하는 시각이 있다고 한다. 특히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지역시설 확충이 시급하지만 '정신병자들과 가까이 하기 싫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시설 입지 선정에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 서울시 측의 설명이다.

이명수 센터장은 "병원들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며 "무엇보다 의사들이 불필요한 환자들을 찾아내 지역 사회로 돌려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수 센터장은 "정신질환자의 인권뿐 아니라 지역 시설을 이용한 치료와 관리가 효과도 있다"며 "서울시 각 구의 정신보건센터에 등록한 환자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재원 일수를 조사한 결과 2000년 216일이던 것이 2003년에는 123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서울 정신건강 2020' 보고서는 정신질환의 평생 유병률을 31.4%로, 정신질환 관리비용을 전체 질병 부담의 15%로 적시하고 있다. 즉 국민 10명 중 3명이 평생 한번 정신질환에 걸릴 만큼 정신질환은 언제든지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가 정신질환자 관리와 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이유다.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jrch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