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04. 15 중앙일보 보도
이명수 서울시광역정신보건센터장 칼럼기사
저살 사이트 막는다고 자살 줄어들까 [중앙일보]
중앙일보·서울시 국민정신건강 캠페인 ‘블루터치’ - 청소년 정신건강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청소년의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작품이 출간된 뒤 30여 년간 수천 명의 유럽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삶에 대한 허망함·좌절감 등이 모방심리와 어우러져 생겨난 사회현상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인터넷 자살 사이트와 연관된 청소년의 동반 자살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당대의 걸작이고, 자살 사이트는 21세기 사이버 시대의 암적 요소이기 때문에 근본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살의 탈출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선 동질적이다.
자살 사이트는 자살에 대한 판타지, 자살 기도 경兀? 동반 파트너 구인 등의 콘텐트를 담고 있다. 요즘엔 재즈를 좋아하면 인터넷 재즈 동아리에 가입해 정보를 나눈다. 영어회화에 취미가 있으면 역시 사이버 동아리에 가입한다. 그러다가 오프라인에서 모임을 갖기도 한다. 같은 맥락으로 ‘난 죽어야 돼, 죽는 게 나아’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살 동아리’를 형성해 우울한 교감을 나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요 없는 사람은 자폐증 환자밖에 없다. 함께 어울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은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사람에게도 남아있다. 단지 그 모임이 암울함에서 건져줄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아니고,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수렁이어서 문제다.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 어떤 면죄부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자살 사이트가 없어진다고 청소년의 자살률이 급속히 감소할까. 자살 사이트는 하나의 시대적 현상일 뿐이다.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보자. 한 여고생이 자살을 했다. 최근 성적이 떨어져 많은 고민을 했으며, PC방에 자주 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사실 보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 접속하고, 인터넷이 자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논리는 추측이다.
자살 사이트는 결코 가볍게 다뤄야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자살 사이트에 청소년 자살의 모든 책임을 몰아세우는 것은 뿌리를 보지 못하고 나뭇가지만을 보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15∼25세의 청년기와 60세 이후의 노년기는 자살 위험이 가장 많은 연령대다. 정체성 확립의 문제, 사회적 역할 증대에 대한 부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이 자살에 한 발 다가가도록 한다.
자살 사이트는 없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자살은 계속될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그들의 정신건강을 돌봐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왕따 현상’을 해결해야 하며,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그들이 힘들 때 자살 사이트보다 더 유혹적으로 유인할 수 있는 건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부모님·선생님·친구들의 따뜻한 관심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명수 서울시광역 정신보건센터장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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