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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이야기-3] 넝쿨째 굴러온 당신, 귀남이가 입덧을 하다/서용진(용인정신병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09.26 조회수296

넝쿨째 굴러온 당신, 귀남이가 입덧을 하다.

 

 

서용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용인정신병원)

극중 방귀남은 장래유망한 의사이며 아내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애처가이다. 이런 귀남이가 아내를 대신해 입덧까지 하게 된다. 여자들의 부러움이자 남자들의 공동의 적이 된 방귀남이의 입덧 대소동에 대해 다시 한번 조명해보자.
“뭐? 쿠베이드 증후군?”
“어, 남자들도 입덧을 하는 거를 쿠베이드 증후군이라고 그런데.”
“뭐야, 그럼 나도 안 하는 입덧을 자기가 하는 거야?”
“예비 아빠들도 호르몬과 두뇌회로가 변화해서 그럴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 구토, 헛구역질, 복통, 소화불량에 심하면 배가 부를 수도 있다고 그러더라구.”
“말도 안돼. 뭐야, 난 괜찮은데 자기 때문에 혹시 들키는 거 아니야?”

현재 방송중인 주말연속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한 장면이다. 잘 나가는 방송국 PD 차윤희와 어릴 적 길을 잃어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의사가 되어 금의환향한 방귀남을 주인공으로 한 이 드라마는 젊은 세대의 사랑과 시댁식구들과의 갈등, 그리고 방귀남의 실종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조금은 가볍고 생뚱맞게 그리면서 어느덧 시청률 30%를 넘어서고 있다. 극중 방귀남은 장래유망한 의사이며 아내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애처가이다. 어버이날 선물로 고리타분한 상품권 대신 자신의 일생과 가족에 대한 마음을 담은 슬라이드 쇼로 가족들의 마음을 울리는 감수성이 있는가 하면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아내의 직장동료에게 다가가 건강상담을 해주며 아내를 담배연기로부터 구원해 주는 지혜로운 남자이다. 한국문화를 모르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에게는 항상 공손하고 깍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아내를 위해서는 부모와 시누이들 앞에서도 당차게 할말은 할 수 있는 용기도 갖고 있다. 그의 외모나 입양아라는 배경에 대해서는 호, 불호가 있을 테지만 이쯤 되면 ‘국민남편’,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01 남자가 입덧을?
방귀남의 아내 차윤희는 시댁식구들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위해 임신을 늦추고 싶어하는 커리어 우먼이다. 물론 국민남편 방귀남은 아내의 마음을 존중하고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사람 일이 어찌 뜻대로만 되랴? 귀남과 윤희에게 계획에 없던 아이가 생긴 것이다. 윤희는 만약 시어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직장을 그만두라 종용할 것을 걱정해 당분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귀남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평소에 찾지도 않던 신 과일을 맛있다며 어석어석 씹어먹고, 매일 타던 자신의 승용차에서 멀미를 하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입덧을 하는 여자의 모습과 똑 같은 ‘남자입덧’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입덧은 여성, 그것도 임신을 한 여성의 전유물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임신사실을 알려주는 단초가 되는 이 생리적 현상은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 다만 태반(胎盤)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융모성 성선자극 호르몬(hCG)’이 가장 유력한 원인이리라 생각되고 있을 뿐이다. 진화론적 생물학 이론에 의하면 입덧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대가나 수태(受胎)를 알려주는 생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태아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입덧은 임신 2-4주에 시작되어 임신 3개월 정도까지 지속이 되는데 이 시기는 태아의 모든 기관들이 발달되는 단계로 적절한 영양공급과 안정적인 생리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엄마는 입덧으로 인해 고통스럽지만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하게 되고 아무 음식이나 무분별하게 먹지 않음으로써 바이러스나 유해물질로 인한 손상의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임신부 입덧의 원인도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남자 입덧의 원인이 알려져 있을 리 만무하다. 만약 입덧이 태반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때문이라는 가설을 따른다면 태반 자체가 만들어질 수 없는 남자의 입덧은 더더욱 설명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남자의 입덧에 대한 관련 서적이나 인터넷 등을 찾아보아도 ‘페로몬의 영향이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혹은 지나친 관심과 애정 때문이다.’ 라는 등의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가설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02 동일시 : 프로이트와 방귀남
정신분석에 심취해 있던 프로이트(S. Freud)는 어느 날 한 남자 신경증 환자를 상담하던 중에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욕망을 느꼈음을 알게 되었고, 이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 갈등이 현재의 신경증적 증상의 원인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는 이런 욕망이 비단 신경증 환자 뿐 아니라 모든 남자들이 심리발달 과정에서 경험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아이는 어머니를 혼자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경쟁을 하며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보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훨씬 힘이 세며 자신을 거세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같은 욕망과 공포감이 해결되지 않은 채 성인기에 이르게 되면 성격적 결함이나 불안, 우울, 분노감 등의 신경증적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짝이 됨으로써 인간의 이러한 심층 심리를 대리 체험한 외디푸스 왕의 이름을 따서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 이름 지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시기에 아버지와의 경쟁을 포기하는 대신 아버지와 닮은 사람이 됨으로써 어머니를 차지하고자 한다. 이 때 아이는 아버지의 행동, 말, 흥미, 버릇, 기타 다른 속성까지도 닮아가게 되는데 이를 동일시(identification)라부른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살해 욕망이나 아버지를 닮아가는 동일시 과정은 모두 의지적인 선택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분석가들은 꿈, 최면, 자유연상 등의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고, ‘동일시’가 단지 외디푸스 기 뿐 아니라 생의전반에,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동일시는 다른 사람의 외적인 측면, 혹은 단편적인 특징을 닮아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모방(imitation)’과는 달리 누군가의 전반적 특성을 자신의 인격이나 삶에 내재화시키는 무의식적 과정이다. 부모를 닮아가는 자녀, 서로를 닮아가는 부부, 존경하는 스승을 닮아가는 제자, 성인을 닮아가는 신앙인들이 모두 동일시에 의한 것이다. 소설 ‘큰 바위 얼굴’에서 주인공이 자신도 모른 채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동일시는 비단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신이 증오하거나 자신을 학대했던 대상에게도 나타난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성인이 되었을 때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는 가족을 때리는 경우 등인데 이를 ‘부정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종종 동일시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발전에도 관계된다. 어떤 망상장애 환자는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이라 믿으며, 이웃들이 모두 자신을 감시한다는 피해망상을 가진 엄마와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딸이 엄마와의 동일시를 통해 피해망상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공유정신병’을 보이기도 한다.

 

자, 이제 귀남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알다시피 귀남은 애처가 중의 애처가이다. 항상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쓰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해 보이면 자신의 일처럼 걱정을 하곤 한다. 어버이날 아침, 친가가 아니라 처가에 들러 아침식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아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 식구들에게 설명을 하고, 촬영장에서 아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배우를 찾아가 “운동부족 때문에 건강이 안 좋은 것 같다”면서 “남에게 시키지 말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도 귀남의 몫이다. 사실 귀남은 아내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앞세운 적이 거의 없다. 임신에 대해서도 ‘언제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거나 ‘아들을 갖고 싶다’거나, ‘두 명은 낳아야 하지 않겠냐’는 등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이 없다. 그저 아내의 말을 듣고 순순히 따라줄 뿐이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윤희가 병원을 찾아와 “난 이제 어떻게 하냐”고 울던 그 순간에도 귀남은 속이 상해 울고 있는 윤희의 마음을 달래느라 아이를 갖게 된 기쁨은 누릴 수도 없었다. 사실 윤희는 임신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생명의 잉태라는 경이로운 현상에 대해 기쁨이나 감사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혹시 시댁 식구들이 임신사실을 알게 되어 일을 그만두라 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다. 이런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귀남,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고스란히 느끼는 귀남. 그는 동일시를 통해 아내와 함께 임신을 하고, 아내와 함께 불안해 한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입덧을 한다.

 

03 몸과 마음의 통로, 둘이 아닌 하나
동일시라는 심리적 과정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몸까지 변하는, 더욱이 남자가 여자의 특징을 경험하게 되는 이런 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연결이 된 것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가 흔히 ‘신경성’이라 부르는 질환들, 즉 신경성 위장염, 신경성 두통, 신경성 호흡곤란 등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런 질환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검사상에는 이상소견이 없다’는 의사의 말이 마치 ‘당신은 꾀병쟁이요’라는 선고처럼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하지만 이들은 정말로 통증을 느끼며 정말로 숨이 가쁘다.

 

과거에는 ‘신경성’이라는 말이 객관적인 신체적 이상은 확인이 되지 않는데 환자는 계속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를 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증상이 정말 신경계통과 관계가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뇌와 척수, 그리고 말초신경계로 연결된 우리 몸속의 광범위한 신경망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연결 짓는 가교(假橋)이다. 수천 조 이상의 신경세포들이 어떻게 서로 작용을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현대의학의 가장 어려운 숙제이며 이 숙제가 풀리는 날,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한 비밀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 했던가? 그렇다면 귀남의 입덧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입덧하지 않는 남편들이여, 각성하자.